이호의 일기.
19XX 06.23
오랜만에 꽤 낡은 기록장을 꺼냈다. 큰 형이 늘 쓰는 걸 보고 귀찮게 왜 저러나, 싶었는데. ... 아, 이 일기장 소장이 보면 어떡하지? ;; 여기에 온 지 몇 주가 지났다. 나쁘진 않아. 술에 취해 잔뜩 헤롱이는 인간들도 없고, 약간의 절망적인 소리들은 술 주정보단 쓴맛이 덜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징징대는 게 없으니 되려 귀찮음이 덜한 기분. 아주 조금 마음 한구석 걸리는 점이 있지만... 별로 신경은 안 쓴다.
19XX 06.06
두 번째 기록. 기록이라 쓰니 약간 생존 기록 쓰는 것 같기도 하고 ㅋㅋ 이 정도 간격이면 나름 꾸준하게 쓴다고 생각해. 형이 들으면 칭찬할 듯. 별다른 사건 하나 없이 오히려 평화로워서 불안할 지경이다. 수많은 인간을 스쳤지만 소장 같은 놈은 본 적이 없다. 속내를 영 알 수가 없어. 무슨 꿍꿍이인지 날이 지날수록 혼혈들은 더 데려오는데, 하나같이 정상인 게 없다. 저들은 어디서 잡아오는 거지? 혼혈이나 영물을 본 적 있느냔 말에 무어라 하려다 말았다. 말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더라고. 그 질문 덕분인지, 기껏 가라앉힌 파도가 출렁이는 느낌이었다.
19XX 06.07
출렁이는 파도가 영 가라앉을 기색을 보이질 않아. 새벽이니 더욱 일렁여. 자꾸 기억에 밟힌 탓에 한참을 뒤척이다 펜을 잡았다. 원래 글자 보면 졸리다고 피에르가 그러던데. (인간들 기준인가?) 가끔 창 너머로 뺨에 닿는 특유의 찬 새벽 공기가 썩 기분이 좋지 않다. 걔는 이 느낌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징그럽게도 나랑 맞이하는 새벽바람은 좋다고 했었어. 분위기도 율령 걔랑 잘 어울렸고 말이야. 이제 자야지.
19XX 07.28
왜 인간들은 새벽에 일기를 쓴다고 하는지 알겠다. 이 시간대만 되면 모든 것이 침몰하는 느낌이야. 가만 두면 정말로 빠질 것 같아서, 참으려다 또 펜을 쥐고 말았어. 잡은 김에 써야지. 밝은 얘기를 적을까? 소장이랑 지내는데 밝은 구석이 있을 리가. (좀 좆같음) 사슴 혼혈이던가... 새로운 애가 왔더라고. 달린 뿔을 보니 괜한 사람이 떠올라 대충 말대답만 해주고 자리를 피했다. 지나간 사람을 바라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아. 정확히는 우리 삶에 맞지 않는다. 그것도 내 자신이 자초한 것이라면.
19XX 08.01
창밖으로 비가 꽤 쏟아졌다. 장마철인 듯. 벌어진 창문 탓에 튄 물방울을 괜히 건드렸는데, 금방 스며들어 사라지더라. 모든 물은 이런 걸까? 너무 짧게 존재를 보이다 사라져서. 그도 그럴 것이 흩어지면 모를까, 꼭 내게 스며들어서. 그게 참 짜증나고 괴로워. 물에 비유하자니 어쩐지 굉장히 감수성 넘치고 외로워 보이네. 난 비 내리는 날이 싫어. 가장 좋아하는 날이었기에 제일 싫어. 먹구름이 득실거리는 것도, 맑은 하늘에 우수수 쏟아지는 것도. 결국엔 어느 한쪽이 피하거나 사라질 거면서.
19XX 08. 29
오늘은 조금 요란스러운 하루였다. 사슴 혼혈이 글쎄, 유리벽을 마구 두드리며 자길 꺼내달라지 뭐야. 소장은 아랑곳 하지 않고 더 깊숙한 곳으로 집어 넣었다. 당분간은 그곳에 있을 거라네. 구석에서 눈물만 흘리는 혼혈을 보면 문득 뿔 덕분인지 율령 어느 한 명이 자꾸만 아른 거린다. 아무튼 정신 없는 하루였어. 되도록 접촉하지 말아야지. 이상한 생각이 날 감싸 놔주질 않으니까. 잡생각은 귀찮은 법이야.
19XX 09.02
실험체를 피할 수는 없겠지? ; 운수가 별로였다. 오늘 그 사슴 혼혈하고 짧고 굵은 대화를 나눴거든. 당신들한테는 욕망을 제외하면 빈 껍데기 뿐이냐면서. 뭔 같잖은 소리인가 싶어 무시하려는데, 자기도 그런 욕망이 있다더라. 그걸 꼭 유리관에 가둬서 막아놓은 기분이래. 그리고 당신들한테도 꼭 선사하고 싶을 정도로의 기쁨이니, 나중엔 보이지 않는 관에 들어가보라나 뭐라나. 아무래도 너무 오래 가둬놓은 모양이다. 슬슬 정신 상태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사이코 아니야? ; 소장한테 입마개 착용 시킬 생각은 없느냐 묻고 싶다.
19XX 09.03
기묘한 하루. 딱 적합한 말을 겨우 찾아냈네. 정확히는 사슴 혼혈의 말이 굉장히 기묘했다. 자신의 욕망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당최 그 흔해빠진 게 왜 욕망일는지 싶어 말문을 열려는데... 딱 깨달았지 뭐. 여기 있는 실험체들 욕망이래 봤자 거대한 게 있겠어? 나나 인간들이나, 전부가 느낄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겠지. 근데 사랑이라니 꽤 의외야. 어영부영 말하는 걸 듣자니 상대는 이미 있는 모양이다. 괜히 틱틱대면서도 조금만 건들면 못 이기는 척 제 얘기를 꺼내는 모습이 꼭... 율령이 같다. 형은 잘 지내려나?
19XX 09.18
실험체와 친구 아닌 친구가 된 느낌이라 좀 이상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엮이지 말자 싶었는데, 생각보단 괜찮은 놈이었거든. 유리벽만 없었으면 내 말본새에 한 대라도 쳤을 기세다. 꼭 우리 형 같고 ㅋㅋㅋ 형 모습만 겹친다면 웃고 넘겼을 텐데, 뿔의 영향을 바탕으로 율령이가 떠오른다. 앞서 일기들 봤는데 왜 율령이 부분만 지웠지? 내가 떠난 주제에 보고 싶다고 쓰기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 몰라. 사람 마음 모른다는 말도 있잖아. 나도 내 마음 몰라.
19XX 10.30
벌써부터 입김을 불면 허연 숨이 뱉어진다. 겨울임을 직시하라는 듯이. 겨울날에 보는 새벽은 왠지 더 어여쁘더라고. 그냥, 사람마다 시선이 다른 거겠지만 말이야. 구름이 드리워지고 빗방울이 우수수 쏟아질 때면 정말로 네가 마치 나를 보고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하늘을 보게 돼. 가장 예쁠 시간대는 새벽이니까, 라며 네가 그랬으니까. 너는 꼭 이따금씩 떠오르는 인물인 것 같다. 잊혀질 수 없는 존재. 딱 그런.
19XX 11.05
사슴 혼혈이 죽었다. 혼혈이든 사람이든 어차피 죽는 것은 똑같으니까. 지독한 악순환에도 지칠 기색 없이 나는 또 무거운 마음을 가졌다. 애당초 이곳 이들에게 정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인데. 소장은 내 잘못이 아니라며 등을 토닥여줬지만, 기분이 이상하다. 저 녀석도 분명 인간인데 왜 나보다 죽음에 더 담담하지? 아니, 어쩌면 나도 담담했다. 그런데 자꾸만, 그에게 덮어진 하얀 천 사이로 흘깃 보이는 사슴 뿔이 누구를 연상 시켜. 만일 내가 없는 사이 그런 일이라도 벌어졌으면 어쩌나 싶어서. 불안하다. 괴롭다. 처음에 사슴 혼혈이 말했던 보이지 않는 관 이야기가 자꾸만 떠오른다.
19XX 11.06
글자를 자꾸만 적었다 지운다. 율령이 부분만. 그러면 내 기억도 모든 것이 지워질 것만 같아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나도 모르겠다. 그냥 지우고 싶어. 차라리 내가 지워지고 싶어. 다른 이들은 보고 싶다 쉽게 내뱉을 수 있다. 그러나 네게만큼은 무게감 있는 말만 뱉게 된다. 이게 무슨 감정이고 행동인지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그럴 자격이나 될까? 스스로 떠난 주제에 차오르는 감정은 많다.
19XX 11.07
괴로워. 천장에 보고 싶다는 네 글자를 그렸다. 왜 그랬을까, 그냥 보고 싶어. 진심이야. 얼마 되지 않는 내 진심을 꺼냈어. 감정이 복잡하다. 멀리 떨어진 내 부모도 이렇게까지 그리워한 적은 없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당초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나도 모르겠어. 이걸 그리움이라 감히 칭해도 될까? 그 아이의 얼굴이 무엇을 보던 조금씩 아른거린다. 거대한 폭풍우가 지나칠 것만 같아. 율령아, 율령아...
19XX 11.12
오랜만에 큰 형에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냐는 인사 따위는 당연 넘겨두고, 율령이의 안부부터. 전화 너머로도 다급함이 느껴졌는지 큰 형은 한숨만 쉬더라. 또 멍청한 생각 했겠거니, 싶었겠지.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이라도 한 듯 율령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째서냐고, 왜 그걸 알려주지 않았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너도 네 마음대로 갔잖아." ... 잔인한 놈들.
19XX 12.01
하늘의 변화를 볼 때면 문득문득 네가 자꾸 떠오른다. 아마 쓰는 일기도 여기까지가 마지막일 거야. 지금 보니 감정팔이 아주 제대로 했네. 떠난다. 형을 만나고, 같이 찾다 보면 율령이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만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하려고.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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